코규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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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년, 약 2년 전에 가까운 2019년 1월의 나는 철학책 20권을 읽었다.

책 한 권과 독후감을 내면 용돈을 권 수마다 주겠다는 부모님의 말에 그랬었다. 단, 조건으로 읽는 책은 철학분야여야 했다. 그래서 나는 아무 철학책을 읽기 시작했다. 별다른 선택기준 없이 고른 20권의 책 중 반 이상에 필히 언급되는 인물로 '소크라테스', 그의 제자 '플라톤', 또 그의 제자 '아리스토텔레스'가 있었다.

 

나는 사실 기억력이 정말 좋지 않다. 그렇기에 이 책이 내가 아는 내용이라 예상 못했으나 그 머리 나쁜 나 조차도 기억하는 내용이 책의 시작부터 적혀있었다. 아테나 재판소에서 본인 사형처후에 대한 변론을 하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록, 그 유명한 아테나재판장에서의 변론이었다.

철학은 우리가 왜 존재하느냐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들었다. 이어서 존재가 끝나는 죽음이란 주제에도 이르러 그 의미를 알고자하게 되는데, 그럼

철학자는 죽음앞에서 어떤 자세를 보일까? 눈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고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집중시킨 눈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일화를 만들었다. 그렇기에 몇 천 년이 지나도록 길이길이 전해지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다.

 

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탐구 방식은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다. 그는 '질문', 산파술의 대화를 많이 한다. 꼬리를 무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꽤나 날카롭다. 누군가가 지식을 펼치면 그 안의 허점을 조목조목 파고들어 말문을 막히게 했다. 이것은 그에게 내려지는 사형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. '청년의 정신을 타락시킨 죄.' 현대에 와서 생각하면 그릇되고 과한 처분이란 생각이 들지만 그 시대적 배경은 달랐거니와 소크라테스가 그만큼 당대에도 저명하고 영향력이 있었기에 사형이라는 처벌까지 간 걸 테다.

어찌되었던 소크라테스는 사형이 내려지는 자리에서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고 그 행동의 바탕으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신념을 보였다. 그가 너무 잘난척한다는 입장의 배심원들을 바로 앞에 둔 채, 오히려 이러한 말을 꺼낸다.

 

"나는 내가 무지함을 안다. 그렇기에 내가 다른 지혜롭기로 소문난 자보다 현명하다. "
(정확히 이건 아니고 이런 뉘앙스)

 

이것은 너 자신을 알라. 와 같은 맥락일테다. 그는 그 자신을 잘 알고 있다. 자신의 아래로 제자가 많다는 것에 기고만장 않고 과대평가도 않는다.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자세가 되어 있는 반면, 그러한 자세는 타철학가들에게서 보이기 쉽지 않았다. 그래서 이 한 가지만큼은 자신의 현명함에 대한 근거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. 더 정확히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지혜를 주장하는 게 아니다.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. 그러나 이러한 무지의 진리 하나만큼은 지닌 철학자라는 거다.

 

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최후가 기록된 파이돈에서는 그는 죽음을 새로운 해방으로서 신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.

소크라테스의 크리톤에선 그의 신념 하나를 더 볼 수 있다. 삶이란 산다는 것에서 의미를 더해야 한다는 것. 훌륭하고 아름답고 올바르게. 이것이 그가 삶을 구걸하지 않았던 이유다. 저 세가지를 포함하는 것은 철학이다. 이 철학을 하지 않고서 소크라테스는 살 수 없다. 그러므로 이것을 조건으로 한 사형유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.

나로선 우선 죽음을 면하고 진리를 깨달으려는 활동을 이루어내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싶은데 말이다.

 

나는 이 책을 기억하고 싶다.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말을 뽑아왔다.

 

"철학 하는 자유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것이 내 이성의 명령이라네."

"사람은 평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, 올바른 사유가 중요한 것이지. 어영부영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, 아름답게,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네."

"죽음은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는 사건입니다."

"크리톤,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 내가 닭 한 마리를 빚졌네. 기억해두었다가 자네가 꼭 갚아주게."

"의심하라, 질문하라, 그것이 철학이다"